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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동지, 모반자

토마스 뮌처는 1487년경 하르츠 지역 슈톨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본주의 교육을 받고 성직자가 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부터 그는 가톨릭 교회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확산하는 종교개혁을 보고 환영하였고, 과거에 수녀였던 오틸리에 폰 게르센과 결혼하였다.

1520년 루터는 뮌처에게 츠비카우의 목사가 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뮌처와 루터의 신학관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뮌처는 그리스도가 베푸는 구원의 길을 믿고 따르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 신앙인 자신이 스스로 내적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을 직접 구현하는 것만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성사의 신비를 믿는 것도, 그리고 루터에 의해 성서가 강조되는 것도 거짓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최후의 심판이 임박하였고, 그리고 곧바로 그리스도의 치세가 이 땅에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신부"와 "박사"에 대항하여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뮌처는 낡은 교회의 "신부"와 종교개혁운동의 "박사"를 비난하였고, 그들을 그리스도교 정화운동의 장애요인으로 간주하였다. 그의 저서 "아무런 생각 없이 편하게만 사는 비텐베르크의 육신에 대항하여"에서 그는 종교개혁이 추구하는 새로운 신학이 악한들의 치세를 굳건히 할 뿐이라고 믿었다.

1523년 뮌처는 알슈테트에서 목사가 되어 첫 예배를 독일어로 진행하였다. 그는 교회를 정화하는데 제후의 지원을 기대하였고, 교회의 정화에 "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작센의 공작 요한 1세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그는 1524년 6월부터 독일 남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여 튀링엔 지역까지 확산되는 농민반란에 관심이 생겼다.

종말론적 정화를 수행할 도구로서의 농민

그는 농민반란의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자신의 신념을 굳혔다. '목사나 제후는 평범한 농민들의 신앙을 방해할 뿐이고, 농민은 자신이 필연적이라 믿는 종말론적 정화를 수행할 도구이며, 그들의 반란은 복음선포를 앞두고 참 세상을 건설할 전제조건이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이러한 최후심판을 집행하기 위하여 그는 농민들을 독려하였다. "고로 불이 뜨거우니, 너희의 칼을 식지 않게 할지어다!"

뮐하우젠 시가 농민반란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뮌처는 그곳의 목사가 되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가 보여줄 "자유도시"의 모델을 원했다. 진군해오는 제후의 군대에 대항하여 그는 300명의 추종자와 함께 튀링엔 지역의 프랑켄하우젠에서 농민반란군과 합류하여 승패를 결정짓는 전투에 참여하였다. 뮌처가 예전에 상징으로 여겼던 무지개가 5월 15일 실제로 전장에 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의 도움으로 세상을 정화하시리니, 용감하게 싸울지어다!", 이렇게 그는 농민반란군에 용기를 주었다.